문학과지성 시인선 브랜드전
이벤트 종료
2023-02-27 ~ 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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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보이는 불빛 하나. 흔들리고 점멸하는 아주 작은 빛.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조금씩 커질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그런 빛. 아직 도착하지 않은 빛, 도착할 빛 앞에서 무엇이든 있게 만드는 믿음은 불가능했다. 틀렸다. 제가 도시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일까요? 제 믿음의 흐릿함이 문제일까요? 제 마음의 약함이 문제일까요? 또 저 멀리 보이는 빛을 상상하고 말았습니다. 투명한 손을 잡고 투명한 발의 무게를 느껴보려 애쓰며 우리는 계속 걸었다. 투명한 발등을 파고드는 어둠을 들어 올리며. -「관광」(pp. 193~94)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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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청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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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서 팔이 나온다.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연약한 떨림을 덮는 손이 나온다. 맘껏 뛰노는 벌판을 체온으로 품는 가슴이 나온다. 혀가 목구멍을 찾아내 살아 있다고 우는 울음을 핥는다. 혀가 눈을 찾아내 첫 세상을 보는 호기심을 핥는다. 혀가 다리를 찾아내 땅을 딛고 일어설 힘을 핥는다. 혀가 심장을 찾아내 뛰고 뒹구는 박동을 핥는다. 혀가 나오느라 꼬리가 길다. 혀가 나오느라 귀가 빳빳하다. 혀가 나오느라 발톱이 날카롭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핥을 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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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시 같은 게 태어나려는 기운, 산기産氣. 늘 그렇듯이 온 우주의 에너지가 씨앗 하나에 모인다. 물질, 반물질 감각, 기억 빛과 어둠. 그 모든 동력들이 고요히 고요히 응축하면서 폭발을 기다리고 있다. -「한 씨앗」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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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아, 옛날에 명랑이랑 말을 꺼내다 울컥 창밖엔 북풍이 윙윙거리고 제니를 물어뜯으러 달려가는 보꼬를 붙잡아 목덜미를 턱으로 내리누르고 난롯가에 엎드려서 앙알대는 보꼬를 다독거리며 복아, 옛날에 명랑이랑 (란아랑 오순도순 난롯가에 퍼질러 누워서 우리 좋았잖아) 말 꺼내다 울컥 (그러니까 복아, 제니랑도 그렇게) 이 밤도 가겠지 이 밤도 그립겠지 -「아까운 밤이 간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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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순간들은 모두 바람의 손을 잡고 올까 걸음을 멈추고 생각해보았어 피아노 소리와 박수 소리가 어디로 갔는지 흙먼지가 느긋하게 일어나다 가라앉는다 빛처럼 죽은 사람이 여기 없는 게 확실한가요 앞서 걷던 강아지가 뒤돌아보며 갸웃거린다 어떤 손이 등을 쓰다듬고 갔나 -「흐름과 바람을 안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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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눈동자가 옛날을 모셔와도 마시고 만져지면서 닳아지는 물질이 이제 저는 아니랍니다 생각하는 일만 허용되는 색깔로 살게 되었습니다 천근만근 애인의 근심만은 입에 물고 물속으로 쿵 눈빛마저 물에 감기어져 사라질 태세입니다 그림자의 손이 아무리 길게 늘어나도 ㅉ이 ㅃ으로 ㄴ이 ㅁ으로 쳐질 때 있습니다 한계령에 낙산사 백사장에 우리 함께 가요,라고 말할 뻔했을 뿐입니다 생각만으로 벼린 색이 되는 날이 제겐 있었어요 그림자 스스로 숨 거두어 가주던 그날 배고픈 정신의 찌 덥석 물어주는 거대한 물방울의 색깔을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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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요새 가스 밸브도 제때 못 잠그고 반찬 통을 엎지르고 컵을 깨고 보온병에 매실이 아닌 간장을 담고 새로 산 옷을 버리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한 뭉텅이 빠지고 했던 말을 까먹고 또 한단다 [……] 그래도 딸아 아들아 우리 열심히 살자 돈을 모아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자 너희들은 나를 의심하게 될 테지만 엄마는 변함없이 너흴 먹여 살릴 궁리를 할 거다 엄마는 그래 단순하고 뻔해 국 새로 끓여 두었다 데워 먹어라 -「엄마의 입맛」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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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이 많아서 삶과 문장을 자주 착각했다 빈 병을 주워 들고 숨을 불어넣는다 내벽에 습기가 어렸다 사라진다 누가 자꾸 나에게 숨을 불어넣는 것 같아 리튬 내게도 내장이 있어요 붉고 움직이고 기능하는 것 사탕을 깨물 때마다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밝다 따뜻하다 빛난다 거짓말을 당장 이백 개라도 지어낼 수 있어요 내가 공간을 익히는 방식이에요 -「파이어워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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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오늘도 골똘히 생각해보았지만 혀끝을 뱅뱅 돌면서 그 이름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앞서가는 동행에게 물어볼까 하던 참에 마침 인왕산 동쪽에서 둥근 달이 솟아오른 것이다 달맞이? 달마중? Dall…… mayr에 뒤이어 아라비카 커피 향 잠깐 코끝을 감돌았다 -「달맞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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