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랜선상담소 답변 : 이진민 작가
청소년 Q&A 교보 랜선 상담소


공부에 대한 흥미 | hj***** 님 질문: 아이가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물어보는데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 아이가 너무나 중요하고 좋은 질문을 하고 있네요. 저보다 훨씬 훌륭한 친구입니다. 저는 유학을 갈까 말까 고민하던 20대 중반을 넘겨서야 처음으로 공부가 뭔지, 공부는 왜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것 같아요. 10대 때는 남들이 달려가니까 저도 따라서 냅다 달렸는데, 방향도 모르고 무조건 뛰다니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두 달 철학 상담소>의 5월 상담 내용이 바로 공부에 관한 것인데, 거기서 중요한 내용을 몇 가지 추려서 전해 볼게요. 우리 사회에서 공부는 시험의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저는 우선 공부가 무엇인지 재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공부는 세상을 폭넓게 이해하고 생각의 힘을 키워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이 공부죠. 그러므로 공부는 꼭 국·영·수 같은 교과목만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철학적 질문, 사랑에 관한 고민, 타인과 다정한 관계를 맺는 일, 요리나 운전 같은 삶의 기술, 응급처치법과 성교육, 심지어 덕질처럼 ‘나’ 라는 인간으로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다양한 영역에 두루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공부를 싫어하는 이유는 공부의 정의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꼽는 공부의 장점은 세상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거예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죠. 생각의 언어가 풍부해지면 사람 뿐 아니라 책이며 영화며 노래며 세상 풍경이며, 그 모든 것이 나에게로 닿아오는 속도와 질이 달라져요. 해상도 높은 화면에서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보이듯, 공부의 질과 양에 따라 내 주변의 세상이 저화질로도 고화질로도 보이는 거죠. 저는 그래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선명한 세상에서 더 잘 소통하고 더 많이 이해하며 살고 싶어서요.

잘하고 싶은 마음 | so******** 님 질문: 공부에 대한 강박 너무 잘하려고 하고 완벽을 추구하려는 아이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멋지게 해내고 싶은 그 마음을 우선 충분히 귀하게 여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불필요한 긴장과 압박이 생긴다면 강약을 조절할 수 있게 도와줘야겠지요. 우선 이 대견한 친구에게 <열두 달 철학 상담소>에 나오는 볼테르의 시 한 구절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잘하려는 것의 적은 가장 잘하려는 것이다.” 너무 잘하려다 보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때가 있지요. 완벽하려는 마음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를 터득한 사람은 채우려 들지 않는다고 말해요. 쉽게 말해서 성공의 비결은 80퍼센트의 지혜에 있다는 거죠. 매번 힘을 100 퍼센트 발휘하는 건 멋지긴 해도 사실 그렇게 현명한 행동은 아니거든요. 80퍼센트 정도를 써 가며 다소 여유롭게 해 나가면, 비축한 힘으로 위기 때 120 퍼센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인데 매번 전력을 다하면 금방 지치고 말겠죠. 강약 조절을 잘해야 결국 더 먼 거리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틈과 여백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만든다는 이 묘한 지혜를 아이가 깨닫게 된다면 좋겠네요. 아마도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완벽주의적 교실과 정답사회의 탓이 클 겁니다. 어른들이 이런 사회를 만들어 놓아서 미안하다고 전해주고 싶군요. 하지만 서투름은 결점이 아니라 가능성이고, 특히나 학생들은 서투를 권리를 충분히 누리며 느긋하게 성장해야 한다고 믿어요. 콘크리트를 배합할 때 적절하게 포함되는 미세한 공기가 건물의 강도와 내구성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헐거움이란 것은 그렇게 우리를 숨 쉬게 하고 오히려 더 단단히 해요. 그러니 부디 헐거움의 힘, 여백의 중요성을 깨달아 좀 더 보드랍게 단단해지기를 바란다고 전해주세요.

번아웃 | tw******** 님 질문: 동생이 좋은 취미도 가지고 그 시기를 즐겁게 즐겼으면 좋겠는데, 바쁜 학교 생활에 치여서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동생에게 전할 톡톡 튀는 철학자의 조언이 있을까요? | 질문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무엇보다 동생이 이 다정함 속에서 종종 쉬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학교 시스템은 참고 견디면 내세에 복이 온다고 설파하는 종교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천국이 있으니, 지금은 참고 견디라고 하죠. 예비라는 말도 참 좋아합니다. 초등학생은 예비 중학생, 중학생은 예비 고등학생, 그 뒤로는 예비 대학생과 예비 사회인이 줄 서 있고요. 지금 좀 참고 미래에 행복해지라고 말하지만, 그 미래에 도달하면 그 다음에 올 미래를 위해 또 행복의 시간을 미루라고 하겠죠. 밝은 미래라는 명목으로 현재를 납작하고 어둡게 만드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미래 때문에 지금의 나를 학대에 가깝게 몰아붙이는 삶. 니체는 그것을 ‘삶에 거스르는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정작 현재의 이 세계를 충분히 누리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어요. 좋은 취미를 가지는 일은 학과 공부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계획대로만 가다 보면 영감을 잃기 쉽고, 당위에 떠밀리다 보면 목표가 흐려질 수 있죠. 사람이 살다 보면 쓸데없는 일을 하며 무수히 쌓아온 시간이 갑자기 쓸모 있어지는 놀라운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 그러니 동생이 좋아하는 것을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현재의 쓸모로 미래를 재단하지 말고, 지금에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랍니다. 최단 거리로 움직이며 낭비 없는 시간만 보내고 있으면 그 사람은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형적으로 가늘어진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질문하신 분께서 이 지점을 너무나 잘 알기에 동생을 그리로 이끌어 주고 싶은 것 같아요. 혹시 가늘어진다는 걸 살이 빠진다는 소리로 알아듣고 좋아하거든 옆에서 적절한 멱살 부탁드립니다. 두 분의 우애 그 자체가 서로에게 기분 좋은 마음의 여유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의 마음 | ju******* 님의 질문: 육아를 하며 일을 쉬고 있는 중인데 조금씩 제가 사라져 가는 기분이 들어요. 아이를 키우는 일과 일을 병행하기 어려움이 있어 한 선택이었는데도 지금까지 나에게 남은 게 무엇이지 싶은 마음에 자꾸만 작아지네요. 이럴 때 제 마음을 다독여 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요? | 저도 일과 육아 사이에서 일단은 아이를 선택했고, 그 선택이 엄마로서의 행복과는 별개로 저를 불안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육아의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어 통장에 들어왔다면 우리에게 이런 정도의 먹먹함이나 좌절감이 늘 드리워져 있을지 저는 가끔 궁금합니다. 내가 사라지는 기분, 껍질만 남은 듯한 기분을 저도 잘 압니다. 제 첫 책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에 있는 ‘엄마의 몸, 엄마의 삶’ 챕터는 이에 관한 기록이에요. 여자가 엄마가 된다는 건 일종의 특이점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여성과 노예는 본질적으로 자유 시민이 되기에 적절치 않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떠올라 서글펐던 시간의 기록이죠. 제게는 특히 읽기와 쓰기가 마음을 다독이는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어요. 늘 읽고 쓰려는 마음을 놓지 않았고, 아이들이 점점 크고 시간이 제 편이 되면서 읽기와 쓰기에서 큰 즐거움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질문하신 분께도 분명 나를 다독이고 일으켜 주는, 내게 잘 맞는 뭔가가 있을 거예요. 고여 있는 시간이 아니라 차오르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시면 어떨까 싶어요. 무언가를 하며 오래 쌓은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다고 믿습니다. 출산과 육아라는 경험이 없었다면 저는 결코 지금과 같은 글들을 쓰지 못했을 거예요. 돌봄의 경험으로 인해 제가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돌봄이 없다면 이 세상은 진작에 작동을 멈추고 망했을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언니네 미술관>에서 ‘사소함, 익숙함, 하찮음’이라는 챕터를 읽어드리고 싶네요. 세상의 모든 사소함은 반어법일지 모른다고, 세상이 사소하다고 규정짓는 엄마들의 삶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게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가보시기를. 조금씩 다시 또렷해지는 기분을 느끼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철학 | py***** 님의 질문: 철학이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 “삶에 꼭 필요한 쓸모 한 가지를 말할 수 있다면?”이라는 질문에 답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철학을 골랐는데(<공부가 인생에 무슨 쓸모인지 묻는다면?>이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우선 질문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철학은 큰 쓸모를 발휘합니다. 해당 질문을 이루는 중요한 단어들, 이를테면 삶, 필요, 쓸모 같은 개념 그 자체를 응시하며 질문의 방향을 고민하는 가장 근본적인 일을 철학이 하기 때문이죠.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대충 안다고 생각하면서 살지요. 외부적으로도 모르는 것 천지지만, 내부적으로도 스스로를 잘 모릅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세상에는 타인에게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로 넘쳐 납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입니다. 장군은 용기가 무엇인지 몰랐고, 시인은 시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했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가 뭘 모르는 건 사실 당연합니다.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이 시시각각 변하거든요. 그러므로 일단은 우리가 뭘 모른다는 사실을 담백하게 인정하고,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수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늘 돌아보고 방향을 살피는 일이 바로 철학이 담당하는 일이거든요. 우리는 필연적으로 실수를 하는데 그걸 조금씩 바로잡아 주는 것이 철학입니다. 나는 나를 잘 모르지만, 철학을 곁에 두면 자꾸 나에 관해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와 이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거죠. 저는 철학이 지팡이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나를 살리고 세상을 지탱하는 도구. 비틀비틀 길을 걸어가는 인간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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