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여름이 제철!> 맛보기!
이벤트 기간: 2025-07-01 ~ 2025-08-31
독서는 여름이 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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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여름만 되면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 하는 나, 왠지 모르게 근사해 보이는 나, 온갖 고민과 불안 따위는 저 멀리 치워두고 그 계절만큼 반짝이고 생기 넘치는 나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김신회
아무튼, 여름




박은지 작가 낭독
「그렇게 여름」 외 7편
「또다시, 여름」
김연수 작가
1. 새벽의 노래
어둠 속에서 어떤 멜로디가 들려온다. 귀를 기울이면 ‘요아케노우타요~’라는 노랫소리다. 그러면 나는 잠시 고민한다. 일어날 것인가, 말 것인가.
그 노래는 해 뜨기 한 시간 전에 흘러나오도록 스마트폰에 설정해놓은 알람이다. 어떤 노래를 고를까 하다가 조용하게 부르는 게 마음에 들어 골랐다.
가수는 sugar me.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고야 나는 ‘요아케노우타夜明けのうた’의 뜻을 알았다. ‘새벽의 노래’라는 뜻이었다. 절묘하게도 용도에 맞는 노래를 고른 것이었다.
처음에는 고민의 시간이 꽤 길었지만—그러는 사이에 해가 뜨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는 금방 일어난다. ‘요아케노우타요’라는 그 뜻을 알아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아침마다 해 뜨는 풍경을 보기로 결심한 것은 어떤 책을 읽고 나서다. 영국의 소설가 사라 메이틀랜드의 『침묵의 책』이다. 거기 이런 문장이 나왔다.
‘새벽이 그랬다. 나는 아침이면 점점 더 일찍 일어났다. 특히 여름의 해 뜰 녘에는—해 질 녘처럼—바람이 잦아들어서 날씨가 맑기까지 하다면 사방이 훤히 트인 곳에서도 한동안 더없이 고요한 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서서히 찾아오는 이른 아침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이 문장을 읽은 뒤, 나도 해가 뜰 때 밖에 나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뒤로 나는 거의 매일 아침 해 뜨는 풍경을 보러 나간다.
해 뜨는 풍경을 보려면 이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공원의 벤치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간다. 나무들 사이로 난 산책로는 아직은 어두워 자전거의 전조등을 켜야 하지만, 어두운 기분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건 새들 때문이다. 새들은 해가 뜨기 전부터 큰 소리로 지저귄다. 그 소리를 들으면 어쩔 수 없이 아침의 기분에 젖어든다.
내가 늘 앉는 벤치는 호숫가에 있다. 호수 건너편으로는 작은 산이 보이는데, 해는 그 산 너머에서 떠오른다. 벤치에 앉을 때쯤 그 산 쪽으로는 여명이 은은하게 비칠 뿐이다. 그러다가 서서히 그쪽이 밝아온다. 벤치에 앉을 때만 해도 모든 사물의 색이 없다가, 일출이 가까워지면 조금씩 색이 생겨난다. 그리고 해가 뜨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죽어 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모든 사물이 반짝인다.
이런 감동을 받은 뒤로는 매일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면 침대에서 일어나 차를 끓여 보온병에 넣은 뒤, 자전거를 타고 해 뜨는 풍경을 보러 가는 것이다.
2. 최저기온 15도그 노래는 해 뜨기 한 시간 전에 흘러나오도록 스마트폰에 설정해놓은 알람이다. 어떤 노래를 고를까 하다가 조용하게 부르는 게 마음에 들어 골랐다.
가수는 sugar me.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고야 나는 ‘요아케노우타夜明けのうた’의 뜻을 알았다. ‘새벽의 노래’라는 뜻이었다. 절묘하게도 용도에 맞는 노래를 고른 것이었다.
처음에는 고민의 시간이 꽤 길었지만—그러는 사이에 해가 뜨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는 금방 일어난다. ‘요아케노우타요’라는 그 뜻을 알아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아침마다 해 뜨는 풍경을 보기로 결심한 것은 어떤 책을 읽고 나서다. 영국의 소설가 사라 메이틀랜드의 『침묵의 책』이다. 거기 이런 문장이 나왔다.
‘새벽이 그랬다. 나는 아침이면 점점 더 일찍 일어났다. 특히 여름의 해 뜰 녘에는—해 질 녘처럼—바람이 잦아들어서 날씨가 맑기까지 하다면 사방이 훤히 트인 곳에서도 한동안 더없이 고요한 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서서히 찾아오는 이른 아침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이 문장을 읽은 뒤, 나도 해가 뜰 때 밖에 나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뒤로 나는 거의 매일 아침 해 뜨는 풍경을 보러 나간다.
해 뜨는 풍경을 보려면 이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공원의 벤치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간다. 나무들 사이로 난 산책로는 아직은 어두워 자전거의 전조등을 켜야 하지만, 어두운 기분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건 새들 때문이다. 새들은 해가 뜨기 전부터 큰 소리로 지저귄다. 그 소리를 들으면 어쩔 수 없이 아침의 기분에 젖어든다.
내가 늘 앉는 벤치는 호숫가에 있다. 호수 건너편으로는 작은 산이 보이는데, 해는 그 산 너머에서 떠오른다. 벤치에 앉을 때쯤 그 산 쪽으로는 여명이 은은하게 비칠 뿐이다. 그러다가 서서히 그쪽이 밝아온다. 벤치에 앉을 때만 해도 모든 사물의 색이 없다가, 일출이 가까워지면 조금씩 색이 생겨난다. 그리고 해가 뜨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죽어 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모든 사물이 반짝인다.
이런 감동을 받은 뒤로는 매일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면 침대에서 일어나 차를 끓여 보온병에 넣은 뒤, 자전거를 타고 해 뜨는 풍경을 보러 가는 것이다.
유월이 되자, 최저기온은 15도를 넘어섰다. 새벽이면 일출을 보러 나가는 나에게 최저기온 15도란, 이제는 홑겹의 외투만 걸쳐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사월까지만 해도 두꺼운 외투에 겨울 바지를 입고 나갔다. 그때는 새벽 기온이 7도쯤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 사월에는 눈도 내렸다. 내리는 눈을 보며 언제쯤 여름이 올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여름은 아직 멀리 있었다.
최근 발표한 소설에 “종종 삶은 끝난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계속되곤 했다”라는 문장을 썼는데, 계절의 변화는 반대인 듯하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계절은 바뀐다.
그렇게 문득, 유월이, 여름이 찾아왔다.
여름이 시작되자 날벌레들이 많아졌다. 거의 반년 가까이 내핍 생활을 하던 거미는 벤치 위 지붕과 벚나무 사이에 엄청나게 큰 거미줄을 지어놓았다. 대목을 맞은 장사치 같았다. 새벽마다 나는 거미줄을 살피는데, 늘 벌레들이 여러 마리 걸려 있었다. 유월 들어 거미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태양은 날마다 조금씩 왼쪽으로 이동한다, 요즈음 나는 낮이면 졸음을 참지 못하고 책상에서 꾸벅꾸벅 졸곤 하는데, 더워서가 아니라, 해 뜨는 시간이 점점 당겨지고 있어서다. 이제 일출 시간은 거의 다섯시에 가까워졌다. 일출을 보려면 그만큼 더 일찍 일어나야 하니, 나는 만성적 수면 부족 상태다.
겨울의 해 뜨는 광경을 보는 건 페르 귄트 모음곡 1번을 듣는 기분이었다. 해가 떠야 비로소 대지가 깨어나는 듯했고, 해가 뜰 때까지는 아무래도 명상의 느낌이었다.
반면 여름의 일출 광경은 드보르자크의 9번 교향곡 2악장을 듣는 것 같다. 아직 해가 보이기 전부터 그 빛은 붉게 하늘을 물들이고, 기대감으로 내 마음은 새들처럼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간다.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일출을 바라보는데, 또 툭, 툭툭,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벤치에서 풀밭으로 내려가 이슬 젖은 풀들을 손으로 뒤적여가며 돌멩이나 알밤 같은 것을 찾았다.
결국 내가 찾은 건 빨갛게 익은 버찌였다. 최저기온 15도가 되면 빨간 버찌들이 떨어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버찌는 새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열매라던데, 떨어진 것은 내가 가져가도 괜찮겠지. 그런 마음으로 나는 빨간 버찌 네 개를 챙겨왔다.
먹어볼까, 말까.
식탁 위에 올려둔 네 알의 버찌를 볼 때마다 나는 고민한다.
3. 땀이 좋다면그러고 보면 지난 사월에는 눈도 내렸다. 내리는 눈을 보며 언제쯤 여름이 올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여름은 아직 멀리 있었다.
최근 발표한 소설에 “종종 삶은 끝난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계속되곤 했다”라는 문장을 썼는데, 계절의 변화는 반대인 듯하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계절은 바뀐다.
그렇게 문득, 유월이, 여름이 찾아왔다.
여름이 시작되자 날벌레들이 많아졌다. 거의 반년 가까이 내핍 생활을 하던 거미는 벤치 위 지붕과 벚나무 사이에 엄청나게 큰 거미줄을 지어놓았다. 대목을 맞은 장사치 같았다. 새벽마다 나는 거미줄을 살피는데, 늘 벌레들이 여러 마리 걸려 있었다. 유월 들어 거미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태양은 날마다 조금씩 왼쪽으로 이동한다, 요즈음 나는 낮이면 졸음을 참지 못하고 책상에서 꾸벅꾸벅 졸곤 하는데, 더워서가 아니라, 해 뜨는 시간이 점점 당겨지고 있어서다. 이제 일출 시간은 거의 다섯시에 가까워졌다. 일출을 보려면 그만큼 더 일찍 일어나야 하니, 나는 만성적 수면 부족 상태다.
겨울의 해 뜨는 광경을 보는 건 페르 귄트 모음곡 1번을 듣는 기분이었다. 해가 떠야 비로소 대지가 깨어나는 듯했고, 해가 뜰 때까지는 아무래도 명상의 느낌이었다.
반면 여름의 일출 광경은 드보르자크의 9번 교향곡 2악장을 듣는 것 같다. 아직 해가 보이기 전부터 그 빛은 붉게 하늘을 물들이고, 기대감으로 내 마음은 새들처럼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간다.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일출을 바라보는데, 또 툭, 툭툭,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벤치에서 풀밭으로 내려가 이슬 젖은 풀들을 손으로 뒤적여가며 돌멩이나 알밤 같은 것을 찾았다.
결국 내가 찾은 건 빨갛게 익은 버찌였다. 최저기온 15도가 되면 빨간 버찌들이 떨어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버찌는 새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열매라던데, 떨어진 것은 내가 가져가도 괜찮겠지. 그런 마음으로 나는 빨간 버찌 네 개를 챙겨왔다.
먹어볼까, 말까.
식탁 위에 올려둔 네 알의 버찌를 볼 때마다 나는 고민한다.
여름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면, 다들 그런가 하면서도 땀을 흘리는 게 좋아서, 라고 설명하면 대개 낯을 찌푸린다. 여름을 좋아한다고 해도 땀까지 좋아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라는 노래 가사처럼.
내가 땀을 좋아하게 된 건 달리기를 시작하고 난 뒤부터다.
처음에는 달려도 땀이 나지 않았다. 그때는 아침에 일어나 달리기를 하러 나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가기 싫었다. 분명 싫은데 또 안 나가면 안 될 것 같고. 그런 이율배반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내면의 갈등이 몇 년간 반복되다가 어느 날, 달리기가 몸에 붙었다.
이 이야기에는 철학적인 구석이 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할 때는 달리기의 힘듦 하나만 보였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거기에는 힘듦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선 몸의 힘듦이 있었다. 호흡이 차오르고, 허벅지가 아프고, 무릎이 시큰거렸다. 그런데 그 힘듦 뒤에는 싫어하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힘듦과 싫증이 서로 붙어 있으니 지치는 한에는 싫어하는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슬픈 건, 어쨌든 계속 달려보니 몸의 힘듦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힘듦은 달리는 사람에게는 평생의 벗이자 반려다.
‘오, 너 또 왔구나!’
이제는 달리다가 힘들어지면 그런 기분마저 든다.
그 정도까지 가게 되면 몸의 힘듦을 싫어하던 마음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된다. 마음은 변덕스럽고 그 목소리는 믿을 게 못 된다. 달콤한 약속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떠들어대는 불평은 다 그때뿐이다.
‘그렇다면 좋아! 변덕스러운 마음보다 평생의 반려인 몸의 힘듦을 끌어안겠어.’
달리기가 습관이 된 순간은 바로 그때였다. 그다음부터는 달리기만 하면 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름 달리기는 언제나 땀범벅이다. 그래서 더우냐면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달리는 동안에는 덥지 않다.
정작 더운 건 달리고 난 뒤다. 그때부터 땀도 쏟아지기 시작한다. 여름의 한낮, 달리기를 하고 난 뒤 이따금 나는 몸을 수그리고 내 그림자 위로 떨어지는 땀방울을 지켜보곤 한다. 그럴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럴 때 나는 정말 여름이 좋아진다.
여름 달리기의 절정은 달리다가 비를 맞을 때다. 이미 땀에 젖어 있으니 소나기라고 겁날 건 없다. 오히려 땀을 씻어주니 반갑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비가 내릴 것 같으면 아예 나가지 않는 게 보통이니까. 비가 올 것 같지 않다가 갑자기 내릴 때만 이런 행운을 맛볼 수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올해는 과연 비를 맞을 수 있을까?
이번 여름에도 나는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4. 일요일의 플레이리스트내가 땀을 좋아하게 된 건 달리기를 시작하고 난 뒤부터다.
처음에는 달려도 땀이 나지 않았다. 그때는 아침에 일어나 달리기를 하러 나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가기 싫었다. 분명 싫은데 또 안 나가면 안 될 것 같고. 그런 이율배반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내면의 갈등이 몇 년간 반복되다가 어느 날, 달리기가 몸에 붙었다.
이 이야기에는 철학적인 구석이 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할 때는 달리기의 힘듦 하나만 보였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거기에는 힘듦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선 몸의 힘듦이 있었다. 호흡이 차오르고, 허벅지가 아프고, 무릎이 시큰거렸다. 그런데 그 힘듦 뒤에는 싫어하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힘듦과 싫증이 서로 붙어 있으니 지치는 한에는 싫어하는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슬픈 건, 어쨌든 계속 달려보니 몸의 힘듦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힘듦은 달리는 사람에게는 평생의 벗이자 반려다.
‘오, 너 또 왔구나!’
이제는 달리다가 힘들어지면 그런 기분마저 든다.
그 정도까지 가게 되면 몸의 힘듦을 싫어하던 마음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된다. 마음은 변덕스럽고 그 목소리는 믿을 게 못 된다. 달콤한 약속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떠들어대는 불평은 다 그때뿐이다.
‘그렇다면 좋아! 변덕스러운 마음보다 평생의 반려인 몸의 힘듦을 끌어안겠어.’
달리기가 습관이 된 순간은 바로 그때였다. 그다음부터는 달리기만 하면 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름 달리기는 언제나 땀범벅이다. 그래서 더우냐면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달리는 동안에는 덥지 않다.
정작 더운 건 달리고 난 뒤다. 그때부터 땀도 쏟아지기 시작한다. 여름의 한낮, 달리기를 하고 난 뒤 이따금 나는 몸을 수그리고 내 그림자 위로 떨어지는 땀방울을 지켜보곤 한다. 그럴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럴 때 나는 정말 여름이 좋아진다.
여름 달리기의 절정은 달리다가 비를 맞을 때다. 이미 땀에 젖어 있으니 소나기라고 겁날 건 없다. 오히려 땀을 씻어주니 반갑다.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비가 내릴 것 같으면 아예 나가지 않는 게 보통이니까. 비가 올 것 같지 않다가 갑자기 내릴 때만 이런 행운을 맛볼 수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올해는 과연 비를 맞을 수 있을까?
이번 여름에도 나는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내게 세상의 모든 음악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달리기를 할 때 들으면 좋은 곡과 좋지만 달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곡. 그리고 나머지 모든 음악.
어떤 음악을 듣다가 좋다는 느낌이 들면 음악 인식 앱을 열고 소리를 채집한다. 곡명이 확인되면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한다. 듣는 동안 달리고 싶어지면 ‘시티 뮤직’에, 달리고 싶진 않지만 좋다면 ‘일요일의 플레이리스트’에 넣는다.
‘시티 뮤직’이라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든 건 몇 년 전이다. 오랫동안 쉬었다가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며 모든 걸 다시 설정할 때였다. 그때는 체력이 약해 ‘시티팝’의 미디엄 템포가 나의 페이스에 맞았다. 그뒤로 페이스가 빨라지며 시티팝보다는 록음악을 더 듣게 됐지만, 플레이리스트의 이름을 바꾸진 않았다.
‘일요일의 플레이리스트’에는 달리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좋은 곡들을 저장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산 너머나 구름 위로 해가 뜨고 나면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시끄럽게 울던 새들도 아래로 내려와 나무와 풀숲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는다. 단단한 공 같던 태양은 높이 떠오르며 그 경계가 흐려지고, 새와 나무와 벚나무와 벤치를 은은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인다. 마치 우리 모두가 따뜻한 물 속에 들어앉은 느낌이다.
그때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갈 때는 ‘일요일의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곡들을 랜덤으로 듣는다. 호수는 타원형이고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호숫가를 달린다. 가다보면 양옆으로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선 길이 나온다.
나는 그 길을 참 좋아한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때쯤이면 아침 햇살은 메타세쿼이아 나무들 사이로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그렇게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는 빛을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린다. 빛은 저기에 있다.
빛의 방향을 알면 그늘에 있을 때도 나는 알 수 있다. 지금은 안 보이지만 빛은 저기 있다고.
나뭇잎과 가지, 가지와 둥치 사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빛을 바라보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안, 랜덤으로 재생되는 노래들 중에서 어떤 노래가 흘러나올 때가 있다. 빛과 그늘을 번갈아 바라보는 내 마음과 그 노래가 완전히 공명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이 아침이 참 좋아지고, 이 세상이 참 좋아진다. 그럴 때면 내 인생이 마음에 든다. 그럴 때면 그 길의 끝에서 자전거를 되돌려 다시 메타세쿼이아 길이 시작되는 곳까지 돌아간다.
아직 노래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노래가 너무 좋고, 지나온 길이 너무 좋으니까.
노래의 길이에 따라 그렇게 세 번 정도 온 길을 되돌아갈 때도 있고, 이어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따라 더 갈 때도 있다. 좋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좋았던 길을 다시 걷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일요일의 플레이리스트’의 기준은 바로 그것이다. 좋았던 길을 되돌아가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 좋은 여름날이 지나가도 괜찮은 건, 그렇게 내게는 노래들이 남으니까.
어떤 음악을 듣다가 좋다는 느낌이 들면 음악 인식 앱을 열고 소리를 채집한다. 곡명이 확인되면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한다. 듣는 동안 달리고 싶어지면 ‘시티 뮤직’에, 달리고 싶진 않지만 좋다면 ‘일요일의 플레이리스트’에 넣는다.
‘시티 뮤직’이라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든 건 몇 년 전이다. 오랫동안 쉬었다가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며 모든 걸 다시 설정할 때였다. 그때는 체력이 약해 ‘시티팝’의 미디엄 템포가 나의 페이스에 맞았다. 그뒤로 페이스가 빨라지며 시티팝보다는 록음악을 더 듣게 됐지만, 플레이리스트의 이름을 바꾸진 않았다.
‘일요일의 플레이리스트’에는 달리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좋은 곡들을 저장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산 너머나 구름 위로 해가 뜨고 나면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시끄럽게 울던 새들도 아래로 내려와 나무와 풀숲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는다. 단단한 공 같던 태양은 높이 떠오르며 그 경계가 흐려지고, 새와 나무와 벚나무와 벤치를 은은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인다. 마치 우리 모두가 따뜻한 물 속에 들어앉은 느낌이다.
그때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갈 때는 ‘일요일의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곡들을 랜덤으로 듣는다. 호수는 타원형이고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호숫가를 달린다. 가다보면 양옆으로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선 길이 나온다.
나는 그 길을 참 좋아한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때쯤이면 아침 햇살은 메타세쿼이아 나무들 사이로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그렇게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는 빛을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린다. 빛은 저기에 있다.
빛의 방향을 알면 그늘에 있을 때도 나는 알 수 있다. 지금은 안 보이지만 빛은 저기 있다고.
나뭇잎과 가지, 가지와 둥치 사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빛을 바라보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안, 랜덤으로 재생되는 노래들 중에서 어떤 노래가 흘러나올 때가 있다. 빛과 그늘을 번갈아 바라보는 내 마음과 그 노래가 완전히 공명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이 아침이 참 좋아지고, 이 세상이 참 좋아진다. 그럴 때면 내 인생이 마음에 든다. 그럴 때면 그 길의 끝에서 자전거를 되돌려 다시 메타세쿼이아 길이 시작되는 곳까지 돌아간다.
아직 노래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노래가 너무 좋고, 지나온 길이 너무 좋으니까.
노래의 길이에 따라 그렇게 세 번 정도 온 길을 되돌아갈 때도 있고, 이어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따라 더 갈 때도 있다. 좋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좋았던 길을 다시 걷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일요일의 플레이리스트’의 기준은 바로 그것이다. 좋았던 길을 되돌아가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 좋은 여름날이 지나가도 괜찮은 건, 그렇게 내게는 노래들이 남으니까.
NFC 키링을 태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