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사람의 하루, 취향이 머무는 장면
읽는 사람의 하루
문장과 가까이에서 하루를 채워나가는
읽는 사람의 하루
책을 만드는 사람의 일상 속 취향의 물건들
20년차 편집자의 아침 풍경.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고생한다. 매일 너무 늦게 자기 때문이다.
늦게 잠들었으면 늦게 일어나면 좋을 텐데, 이제 20년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나는 9시면 사무실
내 자리에서 일을 시작해야 안심이 된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시작할 일이 있고, 갈 곳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게 좋다. 20년 가까이 이어지는 이 루틴이 좋다.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이렇게 아침에 일어나 할 일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고,
나를 기다리는 원고가 있다면 좋겠다.
내가 쓴 책 『에세이 만드는 법』에 나는 “장래희망은 백발이 돼서도 교정지 든 에코백 메고 저자 미팅
현장과 서점을 누비는 ’현직‘할머니 편집자”가 되고 싶다고 썼다. 하지만 요새 책 한 권 한 권 마감할 때마다
이런 혹독한 마감, 정말 백발의 할머니가 돼서도 계속할 수 있을까, 걱정한다. 장래희망을 이루고
싶다면, 정말로 튼튼한 할머니가 되어야겠구나 싶다.
옷은 대충 입어도
심혈을 기울여 고르는 것
이 있으니, 안경과 배지와 귀걸이다.
나는 시력이 매우 좋지 않은 편이지만,
눈으로 뭔가를 읽는 것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몸에 걸치는 것 중
가장 비싼 돈을 투자하는 것이 안경이다.
나를 드러내는 재밌는 안경테와 내 눈에
딱 맞는 좋은 렌즈에 돈을 쓴다.
그러나 돌아보니 가장 좋아하는 안경들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 받은 것이다. 이슬아 작가님이
어느 날 선물해 주신 팔각형 안경, 동료가 이야기장수의 상징색으로 맞춰준 노란 안경, 윤정원 화가님이
선물해 주신 형광색 튀는 안경…… 나의 눈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선물해 준 내 또 다른 눈들.
책과 함께 출근하는 사람.
출근하기 전에는 북카트를 끌어와서 오늘 가방에 넣어갈 책을 고른다. 집에 있는 책장에서 요즘 먼저
봐야 할 책, 병렬 독서 중인 책, 원고 작업에 필요한 책들을 골라 북카트에 넣어둔다. 이 북카트는
거대한 업장이 아닌 집 혹은 작은 사무실에서 쓰기에 딱 좋은 가구다. 유려한 곡선이 들어간 손잡이며,
바닥에서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구르는 바퀴, 아름다운 나무색. 이 북카트는 세 명의 여성 목수가
만드는 가구 브랜드이고 특히 독서인을 위한 아름다운 가구가 많다. 책장, 독서대, 책상, 의자,
펜트레이까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은 가구가 아니다...마치 독서인을 위한 예술작품이다!
오늘을 살아갈 향을 입히는 시간.
자, 오늘도 살아보자! 살아가자! 하는 맘으로 출근길 차에 올라 내 맥박이 뛰는 곳에 향을 입힌다.
이 향수브랜드는 책과 작가, 문장으로부터 시작된 향을 만든다. 이슬아 작가님의 <영보스>향수,
김하나 황선우 작가님의 <투 보이시즈> 향수, 성해나 작가님의 <혼모노> 향수 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연결하고 향수를 위한 새 원고를 받는 과정을 진행하며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리고 이 브랜드에서 급기야 출판사 이야기장수의 향을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즉각 기분이 환해지고 미소가 지어지는 향을 골랐다. 세상에 나의 향기, 우리들의 향기가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매일 너무 좋아서 뿌린다. 이 중 나의 최애는 단연 <이야기장수>향수, 그리고 그 다음은
<혼모노> 향수. 가끔은 그날 만날 사람에 맞춰 다른 향수를 뿌리기도 하는데, 책 세계를 이루는 세 직종이 향이 된 <소설가> <시인> <에디터> 향수도 너무나 사랑한다. 희한하게도 향을 맡아보면 진짜로 소설가 같고, 시인 같고, 에디터 같아서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김훈 작가의 이야기가 담긴 향
회사로 가는 길에 차 안에 걸어놓은 사쉐는 옆에 타는 사람들이 다 이게 무슨 향이냐고 물었다.
좁은 차에 탔는데도 넓고 큰 집이나 숲에 들어선 듯, 깊은 나무 냄새나 촉촉한 흙냄새 같은 것이 난다.
이야기장수의 향을 만들어준 브랜드인 솔테라이브러리와 협업을 진행하며 소설가 김훈 선생님께
실은 ‘향수’에 대한 글을 받고 싶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향수를 쓰지 않으므로 공간에 놓는
자연스러운 생활용품에 글을 쓰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받은 것이 내 차에 걸어둔 ‘북촌 한옥’ 향 샤쉐이다. 북촌은 김훈 선생님의 고향이다. 김훈 선생님은 ‘북촌 한옥’에 대해 이렇게 쓰셨다. “북촌 한옥 마을에서는 오래된 서울의 향기가 난다. 이 냄새는 생활의 향기이고 사람의 향기다.” 생활의 향기,
사람의 향기. 저녁 무렵이면 나는 또 과도한 일에 지쳐서 조금쯤 다른 향기를 입고 귀가하겠지만,
잊지 말아야지 잃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생활의 향기, 그리고 사람의 향기를.
오늘의 북커버
책을 아껴 보는 편은 아니지만, 책표지가 상하지 않았으면 하는 책은 북커버를 씌운다. 내가 오늘 고른 북커버는 정말로 이불처럼 폭닥하고 폭신한 북커버에 심지어 귀여운 캐릭터와 원하는 문구를 자수로 새겨준다. 나에게 이 북커버를 선물받은 사람들이 좀 있는데, 그것은 내가 책 읽는 당신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 사람과 닮은 캐릭터를 고르고 이름 자수를 새겨 책에 이불을 덮어주는 이 북커버, 선물 받고 뜨듯미지근해하는 사람 한 명도 없었다.
직장인의 정체성은 키보드로부터
요즘 직장인들은 키보드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나 또한 그렇다. 지금 내가 사무실에서 쓰는
키보드는 작가의 키보드이다. 이슬아 작가님의 독특한 친필이 자판에 새겨져 있고, 스페이스바는
‘글자와 글자 사이 점프’, 백스페이스는 ‘다시’, +는 ‘그리고’ 등 이슬아 작가님이 다시 해석한 다정한 말들이 쓰여 있다.저소음 바다소금축으로 구매하면 사무실에서 쓰기에도 손색이 없다. 도각도각, 키감은 키보드 연주하는 흥이 절로 나면서도, 동료들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만 키보드가 속닥거린다. 온종일 일하며 누르고 있을 때마다 이슬아 작가님이 악수를 건네는 것 같고 손을 잡아주는 것만 같아서, 아마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키보드를 쓸 것 같다.
사무실에서 편지를 쓰거나 기분을 내고 싶을 때는 회의실에 가져다 둔 타자기를 친다. 아직 타자기 자판이 익숙하지 않아 오타가 난무하고 손 글씨를 쓰는 것보다 오히려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이 타자기 소리, 자판이 스프링처럼 톡 튀어 오르는 감각은 오직 옛날의 타자기만이 줄 수 있는 기쁨이다.
진짜 일의 시작은 지금부터
낮에 외근과 전화 통화와 잡무 처리들로 보지 못했던 원고 교정지를 그제야 펼친다. 기가 막히게 좋은 원고에 보물단지를 껴안은 듯 마음이 풍성해지는 것도, 매일 이 난리를 치면서 과연 ‘백발의 할머니 편집자’로 늙어갈 수 있을 것인가 의심하면서도, 끝내 나의 이 벅찬 업에 고개 숙이게 되는 것도 교정지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운 문장 한 줄이다.
교정을 볼 때 내가 쓰는 필기구는 지워지는 볼펜인데, 책에 메모를 남길 때도 이 펜을 쓴다. 책에 남긴 어떤 메모들은 지우고 싶어지기도 하니까. 얼마든지 내 의견을 철회할 수 있고 지울 수 있도록, 그러다가도 여백에 또 얼마든지 메모를 남길 수 있는 이 ‘지워지는 펜’을 쥐고 있는 순간을 좋아한다.
일은 끝나지 않는다.
아직 못다 한 일을 짊어지고 집으로 간다. 나는 늘 가방이 무겁다. 책표지가 바깥으로 보이는 이 백팩을 보고 사람들은 신기해한다. 사실 이 가방은 아이돌 팬들을 위한 덕질가방 ‘이타백’인데, 나는 이 가방을 오직 이야기장수 작가님들만을 위한 광고판으로 쓴다. 작가님들께 너스레를 떨며 이 광고판은 억만금을 주어도 광고하실 수 없고 오직 이야기장수에서 책 내셔야만 쓸 수 있는 광고판이라고 자랑한다.
이렇게 책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유는 신입사원 때 들은 어떤 선배 편집자의 이야기 때문이다. 그 편집자님은 언제나 원하는 만큼 책 광고를 할 수가 없기에, 밖에 다닐 때마다 책표지가 보이게 손에 들고 다녔다고 했다. 누구든 보라고, 누구라도 보라고. 그 선배 편집자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잃지 않는 편집자가 되고 싶어 가방에 최근에 만든 책들을 짊어지고 다닌다. 누구든 보라고, 누구라도 보라고.
여기에 담길 새로운 책을 만들기 위해 살아낸 나의 하루는, 이렇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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